닫기

[특별기고] 대한민국의 보안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군인-정치가의 리더십(III)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global.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0601000280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06. 17:4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아이젠하워 1953년 대통령 취임: 1930년대 이후 첫 공화당 집권
아이젠하워는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강경파들에 의해서 작성된 강령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동유럽을 해방시켜 얄타체제를 부인한다는 것은 몰상식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자기 강령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부통령 후보에 39세의 리처드 닉슨을 선택하는 데 동의했다. 이때 그는 62세였다. 선거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는 스티븐슨 민주당 후보의 2700만 표에 비해 전체 투표권자의 55.5%에 해당하는, 역사상 가장 많은 거의 3400만 표를 얻었고 선거인단에서 442 대 89로 앞섰다. 동시에 공화당은 상원에서 48 대 47, 그리고 하원에선 221 대 213로 의회를 장악했다. 이것은 굉장한 승리였다. 공화당이 1930년대 이래 한 세대 만에 처음으로 국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사실상 평화 휴전
19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는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각료들과 협의하길 좋아했고 그들의 견해가 국내문제에 반영되게 했다. 그는 특히 험프리 재무장관을 좋아했고 그의 재정정책은 빠듯한 예산통제, 낮은 인플레이션, 강력한 달러와 최소 차용이었다. 이것은 아이젠하워 시대의 큰 성공들 중 하나였다. 그는 덜레스(Dulles) 국무장관을 잘 알았고 그를 이용하여 필요한 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덜레스는 한국에서의 사실상 평화 휴전이라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성공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선거 기간 중 아이젠하워는 한국에 가서 평화를 이루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3일 동안 머물고 역사상 가장 긴 휴전으로 입증된 모든 요소들을 안고 돌아왔다. 그것은 전부 아이젠하워의 작품이었으며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조치였다.

◇"평화를 위한 원자" 의제 UN 제안
아이젠하워의 마음속에서 핵무기의 공포와 그 사용의 위험성이 결코 떠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미국은 이미 1600개의 무기고를 갖고 있었고 하루에 하나꼴로 핵무기를 추가하고 있었다. 그는 핵무기 사용을 결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핵무기들을 그가 소련과 벌이고 있는 외교적 및 군사적 게임의 일부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주변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미국 수소폭탄의 36%와 원자폭탄의 42%가 해외에서 유지되었다. 1953년에 그는 유엔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를 협상 의제로 제안했지만 러시아의 무반응으로 실망했다. 그는 서방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기만 작전과 더러운 속임수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1953년 8월 이란에서 모하마드 모사데그흐(Mohammad Mossadegh) 정권을 제거하고 샤(the Shah)를 부활시키는 중앙정보국의 계획을 승인했다. 마찬가지로 1954년에 그는 과테말라에서 위험스러운 하코보 아르벤츠 구즈만(Jacobo Arbenz Guzman) 정권을 제거했다.

◇한미동맹 체결한 '대한민국 보안관'
1953년 7월 26일 이승만 한국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공화당의 강경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착상태에 이르렀지만 한 주에 10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가져오는 한국에서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 이것은 아이젠하워의 가장 큰 업적으로 보였다. 그것에 대한 대가는 사실상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동맹조약의 체결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대한민국의 보안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휴전으로 절약된 돈의 상당부분을 대한민국의 경제건설로 전환했으며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회고할 때,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아이젠하워가 베트남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는 미국 국민들이 "그가 한국에서 나오고 베트남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원했다.
◇유럽의 NATO 지지
아이젠하워는 처음부터 유럽의 NATO를 지지했었다. 그리고 그는 유럽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공약을 유지해야 한다고 항상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자원에 적합한 자신들의 방어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유럽방어공동체(the European Defense Community)나 유럽군(European Army)의 제안을 환영했다. 그러나 프랑스 의회가 유럽방어공동체를 거부하자 그는 NATO에 독일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는 핵무기 없이 독일의 최대 12개 사단이 NATO사령부 하에 두는 계획을 지지했다. 프랑스 의회가 그 계획을 승인하자 그것은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간주되었고 마땅히 미 의회도 승인했다.

◇대만 독트린
아이젠하워의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종종 적과 자기의 지지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소위 대만 독트린(Formosa Doctrine)의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만 독트린은 만일 대만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위협이 감지되면 미 의회가 사실상 대통령에게 백지 위임장을 준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의도적인 모호성과 기만이 이 독트린의 열쇠라고 말했다. 1955년 1월 미 하원은 이 독트린을 410 대 3으로, 그리고 상원은 83 대 3으로 승인했다. 아이젠하워는 솔직히 중공이 퀘모이와 마추를 공격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독트린 덕분에 중공으로부터 퀘모이와 마추를 지켜낼 수 있었다. 퀘모이와 마추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회고할 때, 그의 경력에서 승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1955년 7월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열린 하늘(Open Skies)"을 소련에 제안했으나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수에즈운하 위기
1956년 1월 15일 비밀 만찬에서 아이젠하워의 가장 가까운 보좌진들이 만장일치로 그의 재임을 찬성했다. 1월 12일 재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TV에 출연하여 자기의 모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주간(interstate) 도로건설 계획을 제시했다. 8월 23일 공화당 전당대회는 그를 박수로 추대했다. 이것은 그의 기념비적 업적이 되었다. 1956년 후반기에 국제무대는 소위 수에즈운하 위기(Suez Canal crisis)에 의해 지배되었다. 처칠의 후임자인 애소니 이든(Anthony Eden) 영국 수상은 중동에서 영국의 감소하는 힘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관심이 없었고, 이집트의 독재자 가말 아브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대령이 나일강에 새로운 높은 댐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허영심에 찬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철회하고 영국도 그렇게 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세르는 영-불 회사에 의해 소유되고 운영되던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다.
이든 수상은 이것을 영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프랑스 및 이스라엘과 함께 그에 대처할 비밀계획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 합의하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진격하여 운하를 점령하기로 했다. 이든 수상은 이 계획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유엔에서 희생자, 즉 이집트를 지지하는 노선을 취했다. 동시에 만일 소련이 프랑스인과 영국인을 공격한다면 의회가 회기 중이 아니라 할지라도 미국의 군사적 조치가 정당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동안 아이젠하워는 제3세계에서 비상한 환호를 받고 아랍 국가들에 대해 우호적인 소위 아이젠하워 독트린(Eisenhower Doctrine)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지역에서 군사적 개입을 허용하는 자기의 중동 독트린을 직접 의회에 제출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해외원조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40억 달러에서 20억 7600만 달러로 감소되었다. 제3세계의 챔피언이 되려는 아이젠하워의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 발사라는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이 로켓 기술에서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통령직 시작 때부터 그는 소련의 로켓 장소들에 대한 긴밀한 감시를 승인했었다. 그는 U-2기에 의한 고도의 정찰비행기의 계획과 생산도 승인했다. 그는 그것이 성공적으로 시험이 되자마자 사용을 명령했다. 그는 그것이 군사적 정보 수집에 긴요하다고 간주했다. 그가 U-2기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하길 원했지만 1960년 5월 1일 U-2기 한 대가 러시아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종사 프란시스 개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는 자살 약품 대신에 낙하산을 이용하였고 러시아에서 체포되었다.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후르시초프(Nikita Khrushchev)는 온갖 난리를 쳤고 1960년 5월 16~19일에 개최된 정상회담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심지어 유엔에서 구두를 벗어 그것으로 의장의 연단을 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발사는 아이젠하워에겐 문제였다. 그것은 미국의 대중들을 경악게 했으며 냉전에 군비경쟁에 대한 점증하는 낙관적 분위기를 뒤집었다. 미디어는 미국이 기술적 우위를 잃고 우주경쟁을 박탈당했다고 천명했다. 대중들의 이런 인식의 결과 아이젠하워는 1958년 중간선거에서 크게 패배하여 의회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8년을 자기 생애에서 최악의 해라고 특징지었다.

◇베를린 위기 극복
베를린 위기는 그의 대통령 임기 중 마지막 시기를 장식했다. 1958년 11월 후르시초프는 만일 미군이 1959년 5월 27일까지 베를린을 떠나지 않으면 그는 동독정부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서베를린으로 가는 지상의 접근을 거부할 권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베를린에 대한 긴장을 높였다. 아이젠하워는 후르시초프가 공갈을 치고 있다면서 제2의 베를린 위기를 준비하기 위해 지출을 증액해야 한다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굴복하지 않고 방위예산을 올리지 않고 전쟁 없이 헤쳐 나갔다. 베를린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이 후르시초프의 도발을 멋지게 해결했다.

◇대한민국 지킨 한미동맹 기억해야
1961년 1월 17일 아이젠하워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기 전에 그는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고별사(Farewell Address)를 발표했다. 그것은 감상적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심각한 경고였다. 그는 미국이 군사-산업 복합체의 부당한 영향력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에 유례가 없는 번영과 평화의 연대를 제공해 주었다. 이 영광스러운 1950년대는 국제무역과 산업생산의 아주 장기적이고 범세계적인 확장을 반영했다. 모든 통계가 말해주듯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미국의 번영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의 파라미터(parameters)였다. 그는 생산적이고 성공적이며 전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산 뒤 78세의 나이로 1969년 3월 28일 별세했다. 그리고 그는 2017년 C-SPAN의 널리 인정된 대통령 리더십에 관한 역사적 조사에 따른 평가에서 미국의 45명 대통령들 중에서 최고 제5위를 차지했다. 그는 세계사적 영웅이었다. 우리가 6·25 참전국의 용사들을 기리고 대한민국의 대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되살렸듯이, 이제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보안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잊힌 역사 속으로부터 오늘에 되살려 그의 영령에 감사하고 후손들에게 그의 공헌을 전해야 할 것이다. (끝)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