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김은구 칼럼] 정읍선언,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기적의 시작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global.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17010008950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17. 18:01

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3>
김은구
김은구 (서울대 트루스포럼 대표)
사회주의자들은 역사를 무기로 이용한다. 이를 역사무기화 전략이라도 부른다. 이는 스탈린의 Disinformation(허위조작정보) 전략의 하나인데 투쟁 수단으로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을 비롯한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역사를 조작해 온 사실과, 한반도 역사를 중화민족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역사무기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역사무기의 구체적 적용은 내러티브의 형태로 나타난다. 내러티브란 어떤 사건에 대한 스토리라인을 말하는데 이를 특정한 견해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수단으로 교묘하게 악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거짓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진실한 정보를 고의적으로 편향된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이슈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강제하거나 겁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무시하고 민주·민족·통일을 절대적인 잣대로 내세우며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도 역사무기화 전략의 일환이다.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규정하는 내러티브는 정읍선언을 적극 이용한다. 남북분단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며 외세를 끌어들이고 민족을 분단해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고 비난한다. 나아가 단독 선거를 통해 세워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뇌까린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와 국내환경에 대한 설명 없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것 자체가 이미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1946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경축 현수막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政府)이다'라고 적혀 있다.
소련 해체 후 비밀 해제된 소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북조선에서 반일적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창설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민주정부를 가장한 친소 괴뢰정부를 북쪽에 세우라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민족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이고 북한 정권 수립이 그 이후인 1948년 9월 9일이기 때문에 얼핏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는 착시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는 눈가림이다. 소련이 진군하고 스탈린의 지령이 내려진 뒤 북쪽엔 이미 별도의 정부가 운영되어 왔다. 1945년 10월엔 북조선 중앙은행이 설립되어 별도의 화폐가 통용됐고,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됐다. 그리고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 등 정부만이 가능한 조치들을 실행했다.

어떤 이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추켜세운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에 의한 약탈과 방화, 강간이 무수히 자행됐다. 1945년, 소련이 점령한 독일에서는 200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독일여성뿐만 아니라 유대인 생존자, 강제노역에 동원된 폴란드·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해 미성년자와 산모도 당했다. 만주로 진격한 소련군은 일본 민간인 아녀자 1000여 명을 강간·살해하는 갈건묘 대학살을 자행했다. 조선에서는 달랐을까? 혹자는 소련군의 강간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한반도는 일본 땅이었고,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다.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약탈과 방화, 강간은 좌파가 추앙하는 함석헌, 강원룡, 안병무 등의 증언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신의주에서는 이런 만행에 참다 못해 청년들이 일어났고 많은 희생을 당했다. 북한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이라는 것도 죽창이 난무하는 인민재판으로 진행된 무상몰수였다. 이러한 폭정에 저항한 많은 사람들이 감시를 뚫고 대거 월남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발언은 이런 혼란 속에 진행된 것이다. 한반도의 정부 구성을 책임진 미소공동위원회는 미·소 간 견해 차이로 재개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또 북한에서는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오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할 것을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을 분단하고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노욕의 표현인가? 참고로 김일성도 처음엔 태극기를 들었다. 하지만 소련은 북한의 국호와 국기, 헌법과 의회구성 나아가 출신성분별 구성원 숫자까지도 세밀하게 결정하여 지령을 내렸고 김일성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을 분단한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승만의 예견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시간만 끌다가 결렬됐고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1947년 9월 17일).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결의했지만(1947년 11월 14일) 소련은 이를 거부했고 2·7폭동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선거는 그렇게 무산될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이 태속에서 사산할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읍선언의 기치에 따라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1948년 2월 26일). 이에 따라 5월 10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진행됐다. 조선의 백성,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사람들이, 그리고 일제의 2등 신민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남녀 모두 주권자 국민이 된 첫 선거였다.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제주에서는 4·3폭동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14연대 반란 사건이 터졌다. 그걸 계기로 우연히 진행된 숙군작업이 없었다면 1년 반 뒤에 발발한 6·25에서 군의 결속을 담보할 수 없었다. 또한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지 않았더라면 현재까지 유엔 역사상 단 한 번만 결성되었던 유엔군도 한국에 파병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보다 아찔하고 긴박했던 기적의 역사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칠흑 같은 어둠과 찬란한 빛의 공간이 나뉘는 위성사진은 정읍선언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김은구 서울대 트루스포럼 대표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