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뭔가를 발견한다고 느끼게 되는 책이다. 고전이란 처음 읽을 때조차 우리가 다시 읽는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다.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고전을 예찬한 이탈리아 문학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제자의 말에 나도 책을 꺼내 줄 친 부분과 접어 둔 곳을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영어단어 'devil(악마)'은 '비방하다' '갈라놓다' '분산시키다' '떼어내다' 등의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diabolos'에서 유래했다. 어원상 악마는 분리하고 나누고, 갈가리 찢는 힘을 가진 존재다. 이 단어의 어원을 염두에 두고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에 악마가 가득한 것 같다. 광장과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말을 맞아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돕기 위해 바자회 같은 것을 여는 것이 아니고, 사회 구성원들을 편 가르기 하며 권력욕과 패거리의 탐욕을 위해 악을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셋 이상이 모인 곳에서는 이간질하는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내 눈에 수많은 악마가 보이듯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나 자신이 악마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온통 악마뿐인가?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라고 한 파스칼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갈 수 있는 존재다. "전당포 노파는 비천하고 더러운 해충이며, 모두에게 해로운 늙은 고리대금업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붙어먹고 사는 흡혈귀에 불과하다. 나는 모든 행위를 감행할 특권을 가진 나폴레옹이 되고 싶다. 내가 그 노파를 죽인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합리화하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해 악마가 될 수 있다. 또한 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하여 분열과 찢음의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냉혈과 광기의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가 스위스 제네바로 도피 중에 아나키스트 혁명가 바쿠닌과 함께 작성한 '혁명가의 교리문답'은 이렇게 시작한다. "혁명가는 불행한 운명에 갇힌 사람이다. 혁명가는 자기만의 관심사도 없고, 일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없다. 심지어 그에게는 이름도 없다. 혁명가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오직 하나, 모든 사고와 열정을 사로잡는 혁명뿐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혁명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해야 한다. 혁명가는 혈육의 정, 우정, 사랑, 고마움, 심지어 존경심까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모든 감정을 혁명의 대의를 향한 냉혹한 열정으로 제압해야 한다." 러시아의 소읍 출신인 네차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청강생 신분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그의 편집광적인 열정과 악마적 마력은 미하일 바쿠닌을 비롯한 러시아의 걸출한 혁명가들을 사로잡았다. 1869년 네차예프는 동료인 이바노프가 그의 독재적인 방식에 실망하여 조직을 떠나려 하자 다른 동료들과 공모해 그를 죽였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혁명 동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이 사건은 러시아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네차예프는 모사꾼이자 사기꾼이었고, 복수의 화신이자 피에 굶주린 범죄자였다. 그가 보여주었던 범죄성과 사악함을 러시아어로 '네차예프시나'라고 한다.
'악령'에 나오는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실존 인물 네차예프를 모델로 삼았다. 표트르는 자신의 악랄한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을 조정하고 부추기는 악마적 존재다. 이 소설은 비정한 혁명가집단이나 잘못된 사회주의 사상을 단순하게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변혁기에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어설픈 관념에 사로잡힌 노예들, 즉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이런 악령에 홀림이 얼마나 잔혹한 비극을 낳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과 '악령'의 주인공을 통해 정의를 독점했다고 확신하는 인간들이 벌이는 대재앙과 폭력 혁명을 정당화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의 악마적 속성을 경고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라스콜니코프와 베르호벤스키 같은 인물은 항상 존재한다.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나를 죽였다"고 뒤늦게 참회하는 라스콜니코프의 탄식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는 어떤 윤리적 훈계나 이론에 자극받은 것이 아니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소냐라는 한 가냘픈 소녀가 주는 생명의 입김과 사랑, 정열의 힘으로 구원받았다.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저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과 그들을 부추기는 사람들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게 할 묘책은 없을까. 살인 폭염으로 신음하는 도시를 식혀주던 가로수 잎새들이 성난 군중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가을은 또 이렇게 속절없이 가고 있다.
/시인·교육평론가